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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立)력, 책과 영화, 그리고 여행

스러져가는 신(神)의 나라 ‘앙코르와트’

스피치라이터의 세상여행

스러져가는 신(神)의 나라
‘앙코르와트’

작년 이맘때 회사를 옮기면서 직장생활 13년 만에 선물처럼 긴 휴가가 생겼다. 이럴 땐 뭔가 남다른 데 가야 직성이 풀린다. ‘어디 보자, 유럽이나 미국은 너무 멀고 비싸. 일본이나 중국은 언제라도 갈 수 있잖아!(생각은 늘 이렇게 한다.) 그럼 동남아? 아냐, 흥청망청 노는 건 별로야.’ 며칠 고르다가 눈에 딱 들어온 곳은 이도저도 아닌 ‘캄보디아’의 씨엠립(Siem Reap)이었다. 그곳에는 앙코르와트(Angkor Wat)가 있으니까.

 
▲ 앙코르와트를 바라보는 정원에서 자유를 만끽해본다. 우측에는 불공을 드리러 나온 탁발승의 모습도 보인다.

#1. 웅장함과 화려함의 극치 

목적지를 앙코르와트로 결정한 건 여러 이유가 있다. BBC가 선정한 최고의 여행지,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세계문화유산, 게다가 게스트하우스 1박에 4천 원이라니. ‘가만 보자, 바(Bar)에서 마시는 맥주 한 잔이 1달러?’ 이게 호기심의 시작이었다. 결정적으로 앙코르와트에 꽂힌 건, 그 단어가 주는 낯설고 신비로운 느낌에 이끌려서다. ‘앙.코.르.와.트.’ 한 글자씩 지금 다시 읽어봐도 혀끝을 타고 흘러내리는 그 마지막 발음까지 참 이국적이다. 

 ‘앙코르(Angkor)'는 크메르인이 정글 속에 세운 대제국의 왕조 또는 그 도시의 이름이고, ‘와트(Wat)’는 사원을 가리킨다. 둘을 합치면 그 뜻이 자연스럽게 나타나는데, 앙코르와트는 ‘앙코르 왕조의 도시사원’을 말한다. 굳이 우리나라에 빗대어 말하자면 ‘신라의 도시왕릉’인데, 그 웅장함은 비교가 안 될 정도다. 

앙코르와트는 동서로 1.5km, 남북으로는 1.3km에 걸쳐 세워진 좌우대칭의 사원이다. 앙코르의 유적지는 이곳을 중심으로 반경 30km에 이르는데, 앙코르톰(Angkor Thom)과 타프롬(Ta Prohm)을 비롯한 1,000여 개의 크고 작은 사원 건축물이 촘촘하게 펼쳐져있다. 그 전체 면적이 약 400㎢라는데 서울의 3분의 2에 이를 정도니 더 할 말이 없다. 

 
▲ 앙코르와트가 축구장 11개 크기라는데, 저 거대석상의 크기는 아마 1톤 트럭 한대 정도는 되지 않을까 싶었다.

#2. 인간과 신이 비밀을 속삭이는 그곳 

오토바이를 개조한 ‘툭툭(Tuktuk)’을 타고 이곳을 여행하는 게 보통인데, 나는 마이리얼트립(My Real Trip)에서 현지 자전거투어를 신청했다. 새벽 4시에 기상해 몸에 쫙 달라붙는 쫄쫄이를 챙겨 입었다. 헬멧과 선글라스를 쓰고 페달을 밟으며 숙소에서 40여 분 달렸다. 순백의 암흑 속에서 일출을 1시간 기다렸다. 탑 중앙의 오른쪽에서 태양이 떠올랐는데, 이곳저곳에서 탄성이 들렸다. 마치 생(生)과 사(死)의 경계에 서있는 듯한 황홀한 느낌에 빠져든다. 핸드폰으로는 그 광경을 다 담지 못할 것 같아, 도중에 촬영을 포기하고 그대로 멍하니 서서 그 풍경을 한참 바라봤다. 어쩌면 ‘내 평생 다시 오지 않을 순간’이라고 생각하면서.

  ▲ 앙코르와트의 일출은 새벽부터 서두르느라 피곤했던 몸을 녹아내리게 한다.

떨리는 숨을 참으며 안으로 더 들어갔다. 영화 <화양연화(花樣年華)>에서 양조위가 장만옥과 끝내 이루지 못한 슬픈 사랑을 봉인한 장소다. 영화도 아름다웠지만, 세월이 켜켜이 쌓인 이곳 앙코르와트의 웅장미는 그것을 가볍게 능가한다. 양조위가 굳이 이곳을 찾아 속마음을 속삭인 건, 아마도 여기에서는 모든 비밀이 영원히 지켜지고, 아무리 긴 시간도 멈출 수 있을 것 같은 기대가 들기 때문은 아닐까.    

  
▲ '화양연화'는 '내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말한다.

구석구석 살펴보다가, 벽에 새겨진 춤추는 압사라 조각을 유심히 봤는데 그 표정이 빛을 받는 각도에 따라 하나하나 다 달랐다. 시바, 비슈누, 라가와 같은 힌두교의 신들과도 일일이 눈을 마주치면서, 손으로는 사원의 황갈색 벽과 그 위에 핀 검푸른 이끼를 조심스럽게 매만졌다.  


▲ 압사라는 힌두교에서 말하는 무희 여신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 주황색 옷을 입은 여러 명의 탁발승들이 내 앞을 휙 하고 지나간다. 무채색 배경을 가로지르는 승려의 주황색, 어딘가 그 둘의 조합이 기묘하게 느껴진다. 슬쩍 따라가 본다. 가볍게 목례를 하더니 맨발로 제단 위에 올라 부처께 향을 올린다. 사람 사는 세상과 신(神)의 세상이 연결되는 순간이다.  

 
▲ 어지럽게 흩어진 향은 폐허가 된 앙코르와트를 떠올리게 한다.
                 

#3 아름답지만 서러운 현실, 그리고 희망 

실제로 12세기 이곳에서는 신이 인간과 함께 살았다. 왕은 죽어서 신이 되었다고 하는데, 왕과 신의 얼굴이 뒤섞인 거대한 석상이 그 큰 눈을 아직도 부릅뜨고 있다. 단언컨대, 이런 광경은 세상 어디서도 보기 힘들다. 40℃의 고온에 살갗이 벗겨져도, 이곳을 오기로 한 건 참 좋은 결정이었다, 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 앙코르와트는 내가 유럽에서 본 그 무엇보다 아름다웠고, 중국보다 크고 화려했으며, 지구에서 가장 낯선 그 무엇이었다. 

 흔히 여행사에서 앙코르와트를 소개할 때 ‘죽기 전에’ 꼭 와봐야 할 곳이라고 하는데, 그건 어쩌면 ‘무너지기 전에’ 오라는 말일 수도 있다. 이곳 앙코르와트가 빠른 속도로 무너지고 있기 때문이다. 유네스코에서 기금을 모아 이곳을 지켜내려 노력하지만, 정작 이 나라는 그럴 여력이 없다. 정치가 혼란스럽다보니, 경제도 어려워 국민 1인당 연간소득이 1,200달러(한화 130만원)를 밑도는 아시아 최빈국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 세월의 흐름과 내전으로 앙코르와트는 상당 부분 파괴되었고, 복구의 속도보다 무너지는 게 더 빠르다.

그런데도 내 눈 앞의 이 문화유산은 후손들의 슬픈 현실을 비웃기라도 하듯, 어쩌면 이렇게나 웅장하고 화려한 것인지. 역사의 아이러니 앞에서 씁쓸한 맛이 느껴졌다. 현지 가이드의 설명을 더 들어보니, 앙코르와트는 단순한 관광지가 아니었다. 조상들이 누렸던 가장 찬란했던 영광을 언젠가는 자신들도 가질 수 있다는 희망을 주는 등대 같아 보였다.  

#4 앙코르와트를 스스로 지켜내길 

페달을 밟아 숙소에 돌아오는 길에 현지인들의 속살과 마주치는 기회가 있었다. 이런 게 자전거 여행의 묘미다. 대부분의 집은 1층을 비워둔 목재 필로티 구조인데, 마당에서 저마다 염소나 소를 키우며 대가족이 함께 살고 있었다. 집마다 TV 한 대를 갖추고 살기 어려워 마을 사람이 브라운관 하나 앞에 여럿 모여 있다. 해가 뉘엿뉘엿 지기 시작할 때라 바깥은 아직 환해도, 실내등을 켜지 않으면 거실 한쪽이 컴컴하다. 그런데도 그들은 익숙한 듯 방안을 어두운 그대로 두었다. 3성급 호텔에서도 간혹 정전이 있어 비상발전기를 항상 꺼내 놓을 정도이니, 그보다 못한 일반 가정의 전력사정이 좋을 리 없다.  

지금은 상상하기 어렵지만, 캄보디아는 1950년대만 해도 경제적으로 한국보다 앞섰다. 한국전쟁 이후 2년간 우리나라에 쌀을 지원했다. 이들은 근현대사의 인류 최대 비극인 킬링필드를 겪었는데, 다행스럽게도 이제는 복잡한 정치 상황을 어느 정도 정리하고 경제발전에 주력하고 있다. 실제로 2000년대부터는 외국자본을 적극적으로 유치하면서 연평균 11%의 고도성장을 이뤘다. 앙코르와트와 같은 풍부한 문화유산을 내세워 관광산업도 발달시키고 있다. 씨엡립의 나이트타운과 같은 곳에서는 네온사인이 밤새도록 꺼지지 않는다.  


▲ 씨엠립의 나이트타운은 그야말로 불야성(不夜城)이다.

그런데 고도성장의 언덕에서 캄보디아의 발목을 잡은 게 바로 ‘전기(電氣)’였다. 발전을 비롯해 송변전, 배전이 모두 엉망이었던 거다. 한국에 돌아와 자세히 살펴보니, 캄보디아는 라오스, 타이, 베트남에서 전력을 수입하고 있었다. 도시는 그런대로 괜찮지만, 지방의 전력상황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라고 한다. 그 가난했던 우리나라가 60년만에 G7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건, 고품질의 전기를 풍부하게 공급한 게 바탕이 됐다. 이곳 캄보디아에서도 전력 인프라를 완성하는 게 시급해보였다. 인류의 문화유산인 앙코르와트를 자신의 힘으로 당당하게 지켜낼 수 있으면 좋겠다. 30년이 흐른 뒤에도, 모두가 마음 놓고 그곳에 갈 수 있도록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