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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立)력, 책과 영화, 그리고 여행

글은, 지루한 일상을 아름답게 만든다

심드렁한 일상을 반짝거리게 만든 세 남자

월터, 그레고리, 패터슨
그들에겐 무슨 일이?

직장인의 삶이란 어디서든 다 그 모양이다. 출퇴근의 반복이고, 야근이 일상처럼 번지고, 상사는 밉고, 내 시간은 내 것이 아니다. 주말은 짧고, 월급은 적고, 세금은 많다, 제기랄. 그런데 우리만 그런 게 아니다. 월터, 그레고리, 패터슨도 마찬가지다. 

#1.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월터(벤 스틸러)는 노총각 샌님이다. 짝사랑하는 여직원에게 말 한 마디 못 걸고, 컴컴한 암실에서 한 발자국도 못 벗어나며, 상사에게 한 마디도 대들지 못한다. 그저 잡지사 <LIFE>에서 사진을 현상하는 걸, 말 그대로 자신의 '삶'처럼 숭고하게 여기며 하루하루 성실하게 일한다. 그저 멍 때리며 다른 삶을 상상할 뿐. 


갑자기 멍때리는 게 소심남 월터의 주특기다. 

아마 마지막 호를 장식할 25번 필름이 사라지지 않았다면, 상상은 계속 됐을 거다. 월터는 그린란드 어딘가 있을 사진작가 숀을 찾아 떠밀리듯 나선다. 거기서 월터는 술주정뱅이 파일럿이 운전하는 헬기에 올라타고, 바다 한 복판으로 뛰어들고, 상어를 아슬아슬 피하고, 폭발 직전의 화산과 마주한다.  


어느새 그는 상상만 했던 걸 정말 하고 있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스케이트보드를 신나게 타고, 설산(雪山)에 올라 숀과 함께 유령이라 불리는 눈표범을 만난다. 구조조정을 앞두고 자포자기하듯 무작정 떠난 단 한 번의 여행에서, 상상이 현실이 되는 생애 최고의 순간과 마주한 것이다. 

#2. 리스본행 야간열차

그레고리(제레미 아이언스)는 더 심각하다. 체스를 혼자 두고, 먹다 버린 티백을 쓰레기통에서 꺼내 다시 마실 정도다. 아무도 듣지 않는 고전문학 수업을 묵묵히 하는 강철멘탈의 그는, 칠흙처럼 퍽퍽한 삶을 관성처럼 이어간다. 


▲ 친구가 없어 가끔씩 체스를 혼자 두곤한다. 

자살하려던 빨간 코트의 여자를 만난 건 그저 ‘우연’이었다. 사라져버린 그녀의 주머니 안에서 <언어의 연금술사>라는 책 한 권과 15분 후 출발하는 리스본행 야간열차 티켓을 발견한 것도 우연이었다. 


잠시 망설이지만, 열차에 훌쩍 올라탄다 

책의 주인공은 1970년대 포르투갈에서 레지스탕스로 활동하며 카네이션 혁명에 참가했던 아마데우다. 책에 남긴 그의 문장들은 시공간을 초월해 그레고리에게 슬며시 말을 건다.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것 가운데 아주 작은 부분만 경험할 수 있다면, 나머지는 어떻게 되는 걸까?” 그레고리는 알고 싶었다. 그 나머지는 정말 어떻게 되는 건지. 아주 작은 부분까지도 최소한으로만 경험하는 자신의 삶이 바뀔 수 있는지.  


▲ 아마데우의 책은 그를 리스본으로 이끈다.

그레고리는 그곳에서 자신과는 너무나도 다른 혁명가의 삶을 목격한다. 최소한의 일상만 유지하는 노(老)교수인 자신과 안정된 삶을 버리고 더 큰 가능성과 희망을 찾아 떠난 혁명가 아마데우. 둘의 삶은 붉은색과 푸른색처럼 대조적이다.

#3. 패터슨

패터슨(아담 드라이버)는 루틴(Routine)이 뭔지 제대로 알려준다. 반복되는 일상과 단조로운 생활은, 그를 예측 가능한 틀에 철저하게 가둔다. 손목시계를 보며 아침 6시 15분에 일어나고, 시리얼에 우유를 말아먹고, 같은 길을 걸어 출근하고, 하루 종일 정해진 코스로 버스를 운전하고, 아내가 챙겨준 점심을 먹고, 퇴근해 애완견 마빈과 산책을 하다, 바에 들러 맥주를 한 잔 한다.  


바뀌는 게 있다면, 일어나는 자세 정도다.

영화는, 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아무런 기승전결 없는 패턴을 계속 보여준다. 시인 이상(李箱)의 소설 권태(倦怠)가 생각난다. 그런데 정작 패터슨은 큰 불만이나 지루함을 느끼지 않는다. 비밀노트에 적는 시(詩, POEM)가 있기 때문이다.  


일상은 그의 비밀노트에 담겨 시(詩)가 된다 

시의 주제는 평범하다. 성냥갑, 공책에 그어진 선, 비, 그리고 아내다. 그는 시를 쓰기 위해 세상을 관찰한다. 손님들의 시시콜콜한 대화, 마을에 새로 생긴 가게, 아내가 만드는 컵케이크, 심지어는 커튼의 동그라미 무늬의 변화에도 관심을 준다. 슬픔이나 지루함, 찌질함, 궁상맞음, 즐겁고 우울한 모든 것들이 다 시의 소재다.

이 세 남자의 공통점은, 그저 그런 일상에 파묻혀 있다는 점이다. 세상은 보잘 것 없는 사건들로 가득 채워져 있는데, 그건 누구에게도 예외가 아니다. 매일 보는 심드렁한 얼굴, 그다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 하루, 며칠째 먹는 같은 음식, 내일도 달라질 게 별로 없는 직장, 그것이 바로 우리네 일상이다.

그런데 이 세 남자가 우리와 다른 건, 일상을 ‘여행’처럼 받아들이게 됐다는 점이다. 월터는 상상을 자신만의 무기로 삼아 해보지 않은 일에 도전했고, 그레고리는 우연히 내가 아닌 것에도 관심을 갖게 됐으며, 패터슨은 주변을 따뜻하게 관찰하고 기록하고 있다. 아무 것도 아니게 흩어지고 말 평범한 삶에 그렇게 의미가 담긴다.

영화 <패터슨>에서 애완견이 그의 비밀노트를 갈기갈기 찢었을 때, 패터슨은 폭포를 보며 상실감을 힘겹게 달랜다. 그곳에서 만난 일본인 시인이 그에게 텅 빈 노트를 건네는데, 그가 남긴 말은 일상을 지루하다며 푸념하는 사람들이 지금부터 해야 할 일이 무언지를 분명하게 알려준다.  


가능성은 기록될 때 시작된다.

“때로는 텅 빈 노트가 더 큰 가능성을 보여줘요!”

지극히 평범한 일상을 특별하게 바꾸는 것은, 도전과 관심, 그리고 일상에 대한 따뜻한 관찰과 꾸준한 기록의 힘이다. 개인적으로는 내가 블로그와 브런치에 꾸준히 글을 올리고, 노력만큼 팔리지 않아도 책을 쓰는 이유다. 지루하고 뻔한 세상에서 나의 존재를 한 줄 남기고 싶다면, 지금 당장 지루하다”라는 그 말이라도 써야 한다. 일단 쓰면, 지루한 일상은 예술의 세계로 들어서게 된다.